원장 칼럼

기독교세계관의 첫 질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진정으로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제임스 사이어는 이 질문을 세계관이 답해야 하는 일곱 가지 질문 중 첫 질문으로 꼽는다. 사이어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 여러 신들, 물리적 우주”가 가능한 대답들이며, 기독교 유신론의 답은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하나님 이해는 기독교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명확히 알 때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과 함의를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된다. 사이어도 하나님을 아는 데 성경이 근본임을 지적하며,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한 가장 충만하고 명료한 계시임을 확언한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장 명확하고 정확히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의 탄생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보여 준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시라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고백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실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믿기 어려울까? 현대인들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게 느낄지 모르지만, 초대교회 시대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영지주의의 가현설은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였을 뿐 진짜 사람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선언하며, 요한일서는 예수 사건을 “듣고, 눈으로 보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져본” 일임을 분명히 하고, 요한이서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던 것을 부인하는 자”는 “미혹하는 자”라고 비판한다(요 1:14; 요일 1:1; 요이 7절).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또한 분명 사람이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인성만 드러나는 것 같은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이다. 폭풍을 만난 배 안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던 순간에도, 새벽에 길을 가다가 배가 고프셨던 순간에도, 죄인들과 친구이자 먹보에 술꾼이라는 비난을 받으실 때도, 죽은 나사로 앞에서 우시던 순간에도,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그분이 하나님이 아닌 때는 한 순간도 없었다(막 4:38; 마 21:18; 눅 7:34; 요 11:35). 예수님이 사람이셨다는 사실은 신성과 인간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배치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신성은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담아냈다.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사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인성을 신성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쏟아붓는 성육신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운데 인성을 품어 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다(빌 2:6-11). 참 사람 됨이 참 하나님 됨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하나님 이해다.

둘째, 예수님의 죽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여 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구원과 관련된 문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약함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행하신 행위는 모든 형태의 능력과 권위를 다 뒤엎어버린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이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시다….이처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거하는 자리요 그 능력을 보여 주는 계시가 되시는 이유는 오직 그가 약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는 약함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약함이 진정한 강함이며, 죽음이 진정한 생명의 길임을 보여 주신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고통의 자리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고난을 정당하게 여기심을 보여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고난당하는 자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부활을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영원히 존재하려는 욕망을 품는 것이 아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현실 앞에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소망하며 지금 고난의 현장에서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신성과 함께 인성을 품으신 하나님, 십자가에서 고난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하나님, 정의를 세우시는 하나님,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 죽음, 부활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명확한 모습이다. 이런 하나님이 기독교 세계관의 핵심이다.

VIEW에 방문교수로 와 계신 경북대 국어교육학과의 류동규 교수님이 전성민 교수님의 “기독교 세계관 기초” 강의를 청강하시며 느낀 점을 나누는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류교수님의 블로그blog.naver.com/ryusway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류동규 교수의 청강일기 (6)

다원주의 사회의 기독교

현대 기독교는 다원주의 사회 속에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기도했던 미국의 한 목사가 ‘모든 종교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마무리한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의 자리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미국 의회에서 또 다른 목사가 ‘Amen’ 대신 ‘A-men, A-women’으로 기도를 마친 사례도 있다. 종교적 의미에서 다원주의란 종교적 신앙 체계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로서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얼마 전 한국의 기도회에서 어느 목사가 설교 중에 바이든 취임식 기도 영상을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장면은 뷰 원우들 사이에서도 작은 이슈가 됐다. 이 목사는 미국의 어느 한인교회를 담임하면서 미국에서도 지명도가 있는 분인 듯, 자신이 미국 의회에서 기도한 적도 있다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는 이유로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한인 목사가 미국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기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미국 사회의 다원주의적, 다문화주의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일 텐데, 이 한인 목사가 근본주의를 고수했다는 이유로 찬사를 받았다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바이든 취임식에서의 이 기도 장면을 어떻게 봐야 할까? 우선 이 장면이 만들어내는 위기 담론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짚어보기로 하자. 이 장면이 한국 교회의 설교에 소환될 때 이는 교회의 위기 담론 속에 자리 잡아 그것을 부추긴다. 사실 교회의 위기 담론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런 정도의 전통 파괴는 꽤 충격적이고 자극적이다. 위기 담론은 이 자극적인 소재를 양자택일적 물음으로 바꾼다. 당신은 예수의 편에 설 것인가, 세상 모든 종교의 편에 설 것인가. 하지만 이 양자택일적 물음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점에서 정당한 물음이 아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특권이요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의 표명은 엄밀하게 말해 이 장면이 제기하는 물음과는 거리가 있다.

위기 담론의 부정적인 효과는 또 있다. 위기 담론이 대개 그렇듯이 이 경우에도 외부의 위기를 말함으로써 내부의 문제에 대해 눈감게 하지 않는지 따져볼 일이다. 또 위기 담론은 일종의 자기충족적 예언과도 같아서 지금 말한 그 위기가 오래 지나지 않아 그대로 실현된다! 목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도 못할만큼 미국 기독교가 위기에 처했고 미국 교회가 이 정도면 한국 교회도 머지않아 그렇게 된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기충족적 예언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좋은 뜻에서 위기를 말하려면 이 위기는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살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뜻을 모아야 것인데, 위기 담론은 그렇지 않다.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위기가 결국 실현될 것을 전제함으로써 위기 담론은 스스로 위기의 원인과 결과가 되어 위기의 악순환을 작동시킨다.

이 장면이 제기하는 더 나은 물음은 다음과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타종교, 타문화와 어떻게 만나야 할까? 여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관용의 태도일 것이다. 그 하나의 예로 리처드 마우가 『무례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시민교양’이라는 개념을 참고할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 ‘Uncommon decency’이다. 직역하면 ‘비상한 품위’ 정도가 된다. ‘다원주의 사회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시민교양’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풀러신학교 총장인 이 책의 저자는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로 ‘시민교양’을 제안하고 있다. ‘시민교양’은 civility의 번역어로, 정중함, 공손함, 예의바름 등을 뜻하는 단어다. 그런데 이 시민교양이 왜 ‘비상한 품위’일까? 저자는 품위 있고 온유한 태도를 지니면서도 동시에 신념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신념을 표명할 때조차 온유하고 품위 있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저자가 보여주는 시민교양은 과연 비상하다. 저자는 미국 내 이슬람 지도자들과도 대화하고 동성애자들의 장례식에도 참석한다. 그러면서도 공적인 공간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견지해야 할 신념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열린 태도를 가져야 할까? 이 점에서 저자는 절충적이다. 그가 말하는 ‘시민교양이란 우리가 리더십을 발휘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기꺼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153쪽)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인이 타인에 의해 변화되고자 하는 열린 자세에는 경계선이 존재한다.'(154쪽)

이 풀러신학교의 총장이 미국 의회에서 어떻게 기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컨대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비상한 특권을 포기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에게 있어 예수의 이름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견지해야 할 신념이지 타종교와의 공존을 위해 품위 있게 내려놓아야 할 것은 아닐 것이다. 신념과 품위가 조화될 수 있을까? 이 책이 담고 있는 여러 사례들을 보면 한 시대 최고의 지성과 교양을 갖추었다고 할 만한 풀러신학교 총장에게도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좀 더 까칠하게 질문해 보자. 타종교와 대화하고자 할 때 내 신념을 고수하면서 부드러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최선일까? 이때 부드러운 태도란 결국 대화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음을 말할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이 아닐까? 내 신념이 바뀔 수 있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타종교와의 진정한 대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관용의 한계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관용은 아무리 관용적이라 하더라도 관용의 주체가 따로 있고 관용의 대상이 따로 있다. 이 점에서 관용은 결국 강자의 언어이고 일방의 언어다. 『관용에 대하여』의 저자 마이클 왈저는 미국인이면서 유태인인 자신의 경험을 들어 관용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경우를 말하면서, 관용을 윤리적 태도로서만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로 제안하였고, 이 제안은 진지하게 살펴볼 만하지만, 『무례한 기독교』의 시민교양으로 말한다면 그 한계가 뚜렷하다고 해야겠다. 『무례한 기독교』의 저자도 시민교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 즉 ‘다른 한편’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기독교인이 타종교와의 대화를 위해 신념을 바꾸다니! 믿음을 버리고 대화를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믿고 있는 믿음의 체계 중 어떤 것은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특정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은 문화가 달라지면 그 달라진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

다시 앞에서 말했던 장면으로 돌아가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 예수의 그리스도 됨, 그리고 그와의 살아있는 관계는 문화가 달라졌다고 해도 바뀔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표명하는 방식은 문화적으로 형성된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 취임식에서, 의회에서 기독교 목사가 공개적으로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근대 국가체제에서 국가와 기독교의 관계는 필연성도 없고 상호간 구속력도 없다. 국가의 공적 의례에서 기도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 있을 뿐이다. 도리어 미국이라는 국가체제의 이념이 기독교로 포장되는 면이 있다. 기독교의 승리라고도 해석될 만한 이런 문화가 다원주의 사회의 한 구성원인 교회에 꼭 좋은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면 아마도 이런 체제를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규정했을 것이다(스탠리 하우어워스, 월리엄 윌리몬 공저,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 1,2장 참고).

기독교가 하나의 정치체제 안에서 타종교와 공존하게 된 상황은 교회가 애써 외면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 문화의 한 특징이고 엄연한 현실이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가 지녀야 할 공적 태도에 대해 교회는 더 열린 자세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교회가 다원주의 사회에 속해 있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할 일이다.

밴쿠버 신임 총영사 VIEW 방문

지난 해 12월 취임한 송해영 신임 밴쿠버 총영사가 1월 28일 (금), VIEW에 방문하여 교직원 및 원우회 임원들과 환담하며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송 총영사와 교육 영사가 내방하였고, 원장 전성민 교수와 이계현 행정실장, 노주동 원우회장과 이선화 원우가 만남에 참여하였습니다. 포스막 센터 콜레지움에서 한 시간 반 정도 VIEW의 한국 기독교와 이민 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해 소개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VIEW가 한국뿐 아니라, 밴쿠버 한인사회에서도 의미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2022년 봄학기 VFM

2022년 봄학기가 시작된 후 첫VFM(View Family Meeting)이 2월 4일 (금), 더비 리저널 파크에서 열렸습니다.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실내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조심스러워 프레이저 강가에 자리잡은 파크에서 모였습니다. 이 VFM에서는 이번 학기 함께 공부를 시작한 10명의 신입생 중 7명이 참석하여 재학생들이 처음 만나 교제하는 시간과 VIEW 방문교수로 지난 1년간 함께 했던 경북대 류동규 교수님 부부의 환송, 또 2022년에 VIEW 방문교수로 오셔서 앞으로 1년간 함께 하게 될 송수진 교수님 (고려대, 경영학)과 한영주 교수님 (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상담학)을 환영하는 시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전히 코로나19로 녹록치 않은 가운데서 신입 원우들이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VIEW 공동체를 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하며 격려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귀국하시는 류동규 교수님이 한국의 일상에 잘 적응하시고 의미 있는 연구를 이어가시길 빕니다. 또한 이번에 VIEW와 함께 하게 된 송수진 교수님과 한영주 교수님이 밴쿠버에 잘 정착하시고 계획하신 일들을 잘 진행해 나가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안전하고 즐거운 VFM이 되도록 애써 준 원우회에 감사드립니다.

2022년 봄학기 개강

이제 12월 말까지 짧은 방학을 보내고, 1월 4부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2022년 봄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1월 중순까지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수업이, 온 캠퍼스 대면 수업이 가능한 과정은 대면 수업으로 전환되었습니다.

  • BIB 540K New Testament Foundations 신약 개론 – 김도현 (streaming)
  • BIB 640K New Testament Theology 신약 신학 – 김도현 (streaming)
  • BOT 502K Elementary Hebrew II 초급 히브리어 2 – 전성민 (on campus)
  • BOT 602K Hebrew Exegesis II 히브리 주해 – 이종경 (on campus)
  • CLD 510K Foundations of Christian Leadership 기독교 리더십 기초 – Randy Wollf & 박진경 (streaming)
  • HIS 641K Modern Intellectual History 근대 지성사 – 최종원 (on campus)
  • HIS 691K Christian View of History and Historical Awareness 기독교 역사관과 역사의식 – 최종원 (on campus)
  • MCS 810K Graduation Project 졸업 프로젝트 – 전성민
  • PES 554K Mission and Peace 선교와 평화 – 김성한 (on campus; modular)
  • PES 652K Theology of Reconciliation 화해의 신학 – 박진경 (streaming)
  • RES 502K Research Strategies 문헌연구방법론 – Bill Badke (online)
  • THS 671K Theology II 신학 2 – Jonathan Wilson & 최종원 (online + Q&A)
  • THS 672 Theology III 신학 3 – 김진혁 (streaming; modular)
  • WVS 500 Worldview Foundations 세계관 기초 – 전성민 (on campus)
  • WVS 600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Worldview Studies 세계관의 철학적 기초 – 양승훈 (streaming)

양승훈, 박진경 교수 에스와티니 사역 소식

기도제목: 몇 가지 EMCU 관련된 기도제목을 드립니다.

– EMCU 의대(의학과) 허가를 위해 계속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에스와티니를 뒤덮고 있는 죽음의 영이 물러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육부 산하 고등 교육국(Eswatini Higher Edcational Council, ESHEC) 국장이 상황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 건축이 진행되고 있는 EMCU 채플 빌딩, 실험동, 대학 간판 공사, 정문 앞 등교 하차 지역 공사가 순적히 진행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마무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EMCU 채플의 바닥공사와 실험동의 내부 공사를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1월 10일에 시작한 월요아침기도회(Monday Morning Prayer Meeting)가 EMCU를 하나로 묶는 영적인 띠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1월 12일에 다섯 명의 신임 교수면접을 했습니다. 이들 중 세 명을 선발했는데 이들이 EMCU의 교수로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에스와티니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에스와티니는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한, 전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절대왕정국가입니다. 전 세계 220여개 국가들 중에는 왕이 있는 나라들이 많지만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지 절대왕정, 다시 말해 실제로 왕이 전권을 가지고 다스리는 나라는 매우 드뭅니다. 이 나라를 식민통치하던 영국이 1968년에 이 나라를 독립시킬 때는 당연히 입헌군주제를 물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독립하자마자 곧 바로 왕이 전권을 장악하고 절대왕정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무조건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주의를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왕이니까 아내를 열 몇 명씩 가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국민 수준으로는 절대왕정이나 민주주의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때 흔히 서구의 발명품이라는 민주주의는 꽃 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 나라의 상황으 로는 어느 쪽을 택하든 사회적 혼란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왕정 하에서 소수의 큰 도둑들이 있는 것이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수많은 좀도둑들이 있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나라에서 왕이 지혜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은데 그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스와티니 왕과 국민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VIEW 동문소식

기독교세계관 세미나

2월 18일(금) 오전 10시에 백석대 장동민 교수님을 모시고 “포스트크리스텐덤 시대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립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와 홍보 부탁드립니다.

신청: https://forms.gle/4tPQixp5ZLpdZF7A9


밴쿠버 동문회 총회

2월 18일 오후 8시(태평양 표준시), 차기 임원진 선출 및 교체를 위해 밴쿠버 지역 동문회 총회를 온라인으로 개최합니다. 많은 동문들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VIEW 후원

VIEW 웹사이트인 https://www.view.edu/donation/에 가셔서 “Donation” 버튼을 클릭하시면 곧 바로 후원자 페이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어디서라도 간편하게 VIEW를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 후원

1월 후원: 김도형, 김민철, 김신정, 김연진, 김인수, 김정욱, 김종우, 김택호, 배덕만, 박기모, 박문식, 박종국, 박흥식, 석종준, 손봉호, 송종철, 양성철, 양승훈, 오성수, 오주희, 우병훈, 유경상, 윤영배, 이대경, 이부영, 이연우, 이영미, 이원도, 장점연, 장호철, 전희경, 정민, 정훈, 채기헌, 채은숙, 최동진, 최현일, 최현종, 허정도, 황성연, 황혜정 (40명, 1,705,000원)

캐나다 후원

1월 후원: 강상훈, 김경웅, 김성민, 김영기, 김영웅, 김정용, 김종규, 민동식, 박동욱, 배철진, 변희지, 서문재, 손무성, 손태환, 신찬웅, 신현철, 심우영, 안적선, 연각춘, 유상림, 유승훈, 이귀영, 이동욱, 이명랑, 이미숙, 이삼열, 이성두, 이은표, 이재용, 이종원, 정의환, 조학현, 주광민, 최성은, 함경식, 황선관, 황재훈, Jung Nam, 무명 1인 (39명, $1,270 (일반후원 $1,120 / Endowed Professorship $150))